사람들은 가끔 육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육체가 정신의 실체화시켜주는 것만 빼면 정신의 중요함에 비해 육체는 별 거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를 바꿔버리는 트렌스젠더를 비웃고 장애우들을 무시하고 게이들을 비난하는 거 아닐까. 바보같은 사람들. 정말로 우리가 무서워해야할 것은 육체의 올바름이 아닌데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해피 투게더나 패왕별희 같은 영화를 동성애적으로 바라보고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좀 슬플 것 같다. 왜냐면 그건 게이 섹스 동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영화니까 안봐, 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협한 눈높이 때문에 영화로 한층 깊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될까?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사람들이 겪는 감정의 깊이나 한계는 참 그렇고 그런, 인생만큼이나 굴곡없는 것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오르는 사랑이나 미칠 듯한 복수심을 경험하기 보다는 조용한 정이나 화남 정도 뿐인 감정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뭐, 그러고는 타인이 객관적으로 볼 땐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자신은 온 우주를 잃은 듯 슬퍼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춘광사설이나 패왕별희는 슬픔을 넘은 아련함, 비통함을 느끼게 해준다. 내 인생에 이런 쓰라린 아련함을 느낄 수 있을 때가 몇번이나 될까? 감정은 쉽사리 학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춘관사설이나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소중한 거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살짜리 철없는 꼬맹이다. 그래서 느낄 수 있는 그 아련함이 더 작을지도 모른다. 춘광사설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성숙에 대한 이야기다. 아휘가 느끼는 잡을 듯 하면 떠나버리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놓쳐버린 아픔, 그리고 결국 놓아주어야 하는 고통. 자신을 통째로 주면서 사랑했기에, 그 희생만큼 찾아오는 커다란 허무함을 그대로 그렇게 공존하듯 받아들이는 마지막 아휘의 모습에 나는 그 어떤 멜로영화보다 가슴이 아픈 슬픔을 느꼈다. 그의 씁쓸한 성숙함의 깊이 때문이다.
패왕별희도 마찬가지다. 역사에 휘둘리는 연약한 예술가의 모습. 자신의 정체성을 온통 극에 쏟아버리고, 현실과 극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이의 모습을 통해 아릿하고 어쩌면 처절한 슬픔을 보았다. 내가 패왕별희를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데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연약한 예술가와 역사에 희생된 개인, 정체성을 잃어버린 남자 등의 다채로운 캐릭터를 무리없이 녹여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해 성정체감을 잃어버린 데이는 그것만으로도 참 아프고 가련한데, 그는 소수자의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부서지기 쉽고 그러한 와중에 역사는 또 참으로 잔인하다. 절절히 고통이고 한이다. 이런 건 아무나 만들 수 없고,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랑 남자가 그렇고 그러는 게 역겨워. 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다. 생긴대로 살아야지 뭐 어째. 가끔은 사람들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성소수자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과 반대로 누구는 그들을 비난할 수도 있다. 영화만큼은 영화로 보면 좋을텐데. 장국영과 양조위의 배드신보다는, 장국영의 게이 연기보다는 아휘와 보영의 스쳐가는 사랑이나 데이의 슬프고도 슬픈 눈빛을 보아주면 좋을텐데. 다만 나는 그래서 안타까울 뿐이다.
쉬쉬하고 숨긴다고 해서 볼 사람이 안보는 것도 아니고, 드러내놓고 보라고 떠민다고 해서 안볼 사람까지 보게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바는, 그냥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받아들여줬으면 싶은 거다.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악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찌보면 우리는 다 소수자고 약자 아닌가.
-2007.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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